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다칸 죽음의 행진 (문단 편집) === 처음엔? === 1942년 보르네오 섬 동북부 지역의 공항건설을 위해 보르네오 포로수용소의 일부로서 설치된 산다칸 포로수용소(소장: 호시지마 스스미 대위)는 1943년 가을에 호주군 1,800명, 영국군 700명을 포함해 도합 2,500명(2,000명이라는 설도 있다)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. 처음 의외로 산다칸 수용소와 보르네오 섬의 각 수용소에서 포로취급은 괜찮은 편이었다. 포로들은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지만 그 대신 임금이 지불되었다고 하며 매점의 운영도 이루어져 감시도 심하지 않았다. 이러한 취급은 제16군 사령관이자 보르네오 섬 포로수용소의 최고책임자였던 일본에서 존경받는 덕장 [[이마무라 히토시]]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. 하지만 '''이마무라 히토시는 11월에 현지를 떠나게 되었고 후임으로 바바 마사오가 이 자리에 오면서 포로들에게 비극의 서막이 시작되었다.'''[* 이는 '일본군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'는 이유로 이마무라의 현지친화적인 정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대본영의 조치로, 당연히 후임자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인물로 내정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